책 읽어주는 여자

시선으로부터 - 정세랑

RACHEL 은비 2020. 11. 10. 23:04

정세랑 작가님 책 너무 좋다~! 읽을 때 마다, 어떻게 이렇게 문장을 잘 쓰지! 감탄이 나온다. 요새 계속 자기계발/정보습득 관련 도서만 읽다가, 오랜만에 재밌게 소설 한편을 다 읽은 것 같아 기분좋다. 특히나 정세랑 작가님 소설은 다양한 등장 인물이 많이 나오는 편인데다가, 각 인물들 독백을 읽다보면 너무나 다 내 친구 같아져서, 소설 하나 읽고나면 뭔가 내 세계가 좀 더 풍부해진 느낌이 들어서 좋다.

소재도 재밌고, 사회 문제들도 다루고 있어서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고, 독특한 직업에 대해서 그 직업에 오~랫동안 종사하면서 쓴맛단맛 다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을 법한 통찰 같은, 그런 흥미로운 것들도 잘 묘사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.

최근에 정세랑 작가님의 다른 책 '보건교사 안은영' 이 Netflix 를 통해 드라마화가 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되었는데, 정세랑 작가님의 진면목을 보려면 아무래도 역시 책을 통해서 봐야하는 것 같다. 그 각각의 인물들의 독백에서 나오는 각양각색의 매력.... 이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듯한 독백을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책 한 권을 어느새 다 읽게된다.

문제는, 책을 꽤 자주 내셔서 (다행히도) 읽고나면 책 내용을 까먹을 때가 많다...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다음번에 또 한번 더 읽을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이번엔 잘 기록해둬야지!

본문 중에서...

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.

그것을 모조리 입력한 인공지능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지만. (여기서 Suit 의 Donna device 생각났다! 정말 곧 이런 기술이 개발되지 않을까)

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가 뭘까요? 라는 질문에 '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' 라고 답하며,

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.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?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. 스트레스 핸들링에 그만큼 도움되는 것도 잘 없습니다. 제법 괜찮은 섹스는 감은 눈에 존재하지 않는 색깔을 떠오르게 하니, 그림일기를 쓰고 싶어질지 몰라요.

 

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다. 아픈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져서,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.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보호법이었다.

낙관을 위해,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,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한 게 없었다. 그렇게 가까스로 키워놓았더니 미국으로 날아가버렸지, 내 딸... 난정은 우윤이 보고 싶어 내내 우는 대신 계속 읽었다. 읽고 읽었다.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책 탑을 쌓았다. 딸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웠다.

그렇게 단언하시면 안 돼요. 세상에 단언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고, 단언하는 사람은 쉬이 믿으면 안 된다고 어머님이 네번째 책에서 한 단원 분량으로 말씀하셨잖아요?

아 그럼, 영혼이 닮을 수 있지.

내가 어디서 왔는지 마우어에게 분명 말했는데도, 마우어가 나를 그의 '하와이안 걸'로 불렀던 것은 나에게도 하와이 사람들에게도 무례한 대접이었다.

우리 지수는 아기일 때부터 웃겼어. 뭘 믿고 맡길 수는 없지만

그것도 언니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, 절대 물어보지 마세요.

유명세는 모든 걸 왜곡시켜버리는 경항이 있어.

아이구, 무서워라. 하지만 무서우면 잘 만든 거겠지. 근데 원래 예술보다 예술 조금 옆이 더 재밌다. 나도 그랬었다.

십 년에 지났고, LA에서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에 동행 없이 탔다. 옆 좌석이 빈자리였는데, 어쩐지 할머니가 곁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.

함께 아팠던 친구들을 보면 곧 죽어도 후회 없을 만큼 용감해지거나, 언제나 죽음을 의식하며 조심스레 살아가는 듯했는데 자신은 역시 후자에 속한다는 점이 내심 못마땅했다.

오리들은 이상할 정도로 경사에 약해서, 물에서 땅으로 올라오는 데 곤란을 겪을 때가 많았고 뒤셀도르프 사람들은 오리를 위한 돌계단들을 군데군데 만들어두었다.

"오리에게 친절한 사람들이 사람에겐 친절하지 않다는 게 이상해요."

그때야말로 가까워졌다고 했다. 뒤셀도르프에서 두 사람만 남은 느낌이었기 때문에. 부당한 도시에서 오로지 서로만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었기에. 사람을 꺾는 모멸감 속에서 사랑이 싹텄던 것이다. 독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처럼.

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,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. 나는 치욕스러운 경험도 요긴한 자원으로 썼으니 아주 무른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.

사람이 제일 신나는 모험이었다. 쪽지 보내는 변태들만 잘 걸러내면...

(서핑 instructor 앤디와, 우윤이 처음으로 파도를 타고나서)

두 사람 다 바로 작별인사를 하지는 못했다. 기쁨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었다. 앤디는 자신의 세계를 우윤에게 성공적으로 전했다는 것에, 우윤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행위 중 하나를 그럭저럭 해냈다는 것에 기쁨을 느껴서 서로 그것을 친밀감으로 착각했다.

이를테면 요새 유행하는 명상 앱의 차분한 목소리를 닮았던 것이다.

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,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.

결혼을 매 순간 갱신으로 계약하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는 게 아니었어. 알면서도 뛰어들었지...

무엇보다 애방처럼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끝없이 불러모으고 연결시키고 판을 벌였다.

뺨에 흐르는 땀방울들로 고생이 시각화되었기에.

그리고 그 시대 여자들은 다른 여자가 귀엽다 싶으면 김치를 보냈다고.

할머니는 그렇게 정교한 듯 단순한 사람이었죠. 화수가 양산을 좋아하는구나, 그럼 또 줘야지.

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.